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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엔 진심, 도덕엔 무관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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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25-05-28 11:27 조회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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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엔 진심, 도덕엔 무관심 사회(조선칼럼)

흥미도 취미도 하향 평준화
먹는 일엔 다들 열성이면서
공동체 미덕엔 왜 침묵하나
일본 도쿄 한복판엔 '읽자 골목'
프랑스 파리엔 헌책방 거리
서울엔 곳곳에 '먹자골목'뿐
이러면서 '문화 강국'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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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대세인 오늘날, 아이들은 전통적 주택가에 있던 골목을 아예 잘 모른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강남 키즈’ 같은 부류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나마 남아있는 골목들 또한 옛날 모습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골목이 ‘먹자골목’으로 바뀌는 까닭이다. 시나브로 골목은 몰라도 먹자골목은 아는 시대가 되었다. 현재 먹자골목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다.

도처에 먹자골목이다. 서울과 지방을 불문하고, 도시와 농촌에 상관없이, 업무 지구와 주거 지역을 가리지도 않고, 먹자골목이 하루가 멀다 하게 늘고 있다. 전국적으로 수백 곳은 된다는 추정도 있다. 식당가라면 물론 다른 나라에도 많다. 개중에는 세계적 명소도 있다. 하지만 우리처럼 ‘먹자’와 골목이 원색적으로 결합한 경우는 없다. 먹자골목 자체가 장소 브랜드처럼 돼, 골목 형태가 아닌데도 먹자골목이라 부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자영업자끼리 자연스레 모인 것도 있고, 지역 상인회가 주도한 것도 있으며, 지자체가 개발한 것도 있고, 민간 기업이 기획한 것도 있다.

먹자골목은 외식 문화 확산에 부응하고 집적 경제를 통해 경쟁과 다양성을 촉진할 뿐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먹자골목이 온 나라를 ‘먹자판’으로 만드는 주역 가운데 하나라는 점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듯, 먹는 일을 도락(道樂)이나 호사(豪奢) 혹은 업(業)으로 삼는 이가 너무나 많다. 맛집 찾기가 일상화된 가운데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블로그 등에는 음식 사진과 식당 리뷰가 차고 넘친다. 먹는 방송, 곧 ‘먹방’은 우리나라가 원조다. 그래서 영어로도 ‘Mukbang’이다. 점점 더 자극적으로 진화 중인 먹방 콘텐츠는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푸드 포르노’라 일컫는 것이다. 최근에는 술 마시는 방송, 곧 ‘술방’도 인기 급상승 중이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G. Simmel)은 “집단에 소속된 개인들 사이의 공통적 관심사는 가장 낮은 수준을 지향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동기나 흥미의 하향 평준화인데, 이때 그가 예로 든 것이 바로 먹는 일이다. 가령 동창회 같은 모임에서는 먹는 이야기가 공통 화제로서 제일 무난한 법이다. 먹는 일은 가장 원초적 행위로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좀 더 정신적인 차원의 관심사는 남들과 쉽게 공유하기 어렵다. 각자 입장이 달라 오히려 갈등 소지만 커지는 게 일반적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일에 관련된 차원에서는 서로 열심이고 진심인 반면, 삶의 본질적 가치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도덕이나 양심, 정직, 염치와 같은 인간적 덕성에 관해 서로 말을 조심한다. 정의나 신의(信義), 관용과 같은 공동체 덕목에 대해서도 의견 교환을 망설인다. 일상적 대화에서 정치를 끌어들이는 일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금기가 된 지 오래다. 요컨대 작금의 한국형 ‘먹자판’은 근대사회의 ‘공론장’ 개념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2011년 서울 종로구 금천교 시장은 ‘세종마을 음식 문화 거리’라는 명칭의 먹자골목으로 탈바꿈했다. 그 지척에는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석이 서 있다. 한글 창제로 민족문화의 신기원을 이룬 바로 그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 주변에는 글이나 책, 문구류 등에 관련된 문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세종대왕이 육식을 좋아한 대식가(大食家)라 해도, 지금 우리가 그를 먹자골목을 통해서까지 기억해야만 할까?

우리에게 먹자골목이 많다면 일본 도쿄 한복판에는 ‘읽자 골목’이 있다. 진보초(神保町) 일대는 동네 전체가 세계 최대 규모 서점이다. 100년이 넘은 곳이 수두룩한 가운데 지금도 책방 백수십 곳이 도시 경관에 무게를 얹는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2024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철거 위기에 직면했던 센강 일대 세계 최장의 헌책 노점상 ‘부키니스트 거리’를 끝내 지켜냈다. 이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청계천 고서점들이 사라진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세상사(世上事)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먹자골목을 있는 그대로 봐 준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문화 강국을 꿈꾼다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위한 자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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