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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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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17-02-08 14:34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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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5]

선조는 계산된 리더십의 전형 … 장군들의 사생결단 효과 노리고
'니탕개의 亂' 때 잘 싸운 武臣을 '패배한 무장은 사형'이라며 처형
어린 시절엔 명종 임금 앞에서 '영악한 계산'으로 후사 낙점받아

송우혜 소설가송우혜 소설가
선조가 시행했던 대(對)일본 전쟁 방어 조치 중에서 최고이자 최선의 성공 사례는 바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수(超授·정해진 규정을 크게 뛰어넘은 임명)'를 명분 삼아 극력 반대하는 사간원을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지위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말로 억누르며 임명을 관철했다. 선조는 언제부터 이순신을 그처럼 전폭적으로 신임하게 됐을까. 계기는 이순신이 겪은 생애 최초 실전(實戰)이었던 니탕개(尼湯介)의 난 진압전이었다.

니탕개의 난은 선조 16년(1583) 계미년 1월 하순에 발발한 북변의 대전란이다. 명종 10년(1555) 을묘년에 대규모 왜적이 전라도 해안에 침공해 막대한 피해를 준 '을묘왜변' 이후 선조 16년에 이르기까지 28년 동안, 기이하게도 조선에는 외적의 침공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선조 16년 1월 하순에 여진족 번호(藩胡·조선에 복종하며 국경의 울타리 역할을 했던 여진족)의 대추장인 니탕개가 돌연 1만기 대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함경북도 육진 중 가장 큰 성인 경원진성을 공격했다. 조선군 아홉 배가 넘는 여진족 기마 전사들의 공격을 받은 경원진성은 성 일부를 한나절 동안 함락당했다가 회복했다. 문자 그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육진 최고 맹장(猛將)이자 덕장(德將)인 경원 부사 김수의 목숨을 건 활약과 뒤늦게 도착한 구원군의 도움으로 그 정도 피해로 끝났다. 니탕개군은 경원진 산하 부속 진보 네 곳도 공격했다.

급보가 도성에 닿은 날은 2월 7일, 선조와 신하들은 경악했다. 황급히 대신과 군사 업무를 전담하는 비변사 신료들을 소집해 대책 회의를 열고 현지 주둔군의 방어 체제 정비 및 변경과 구원군 파견 문제 등을 강구했다. 이때 상황을 잘 담은 사료가 있다.

'경기도 아래의 5도에 명하여 군사를 징발해 북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때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백성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자 동리에 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지경이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칼럼 관련 일러스트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 대전란은 선조가 등극 이래 최초로 외적과 맞닥뜨린 전쟁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대처 방식은 매우 파격적이고 잔혹했다. 경원성 일부를 일시 함락당한 죄를 물어 "경원 부사(정3품) 김수와 판관(종5품) 양사의를 즉각 체포해 군진 앞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유례없는 대규모 적군이 돌연 쳐들어온 전쟁 초기라 군사 한 명도 아쉬운 판인데, 육진 최고 실력의 무장인 김수와 그 수하 장수를 처형하라고 하니 기막힌 일이었다. 비변사 당상들은 말려보려고 간절하게 노력했으나 선조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서 구원군이 도성을 떠나기도 전에 두 장수를 처형할 대궐 선전관이 먼저 육진을 향해 급하게 달려갔고, 두 무장은 부하 군사들 앞에서 목이 잘렸다. 선조로서는 적은 아군으로 대규모 적군과 싸운 거라서 변명할 여지가 있다 해도, 어쨌든 '패배한 무장은 사형'이란 원칙을 세워놓고 단호하게 실시하면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은 물론 군사들 모두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패배한 무장 반드시 죽이기'는 계속되었다. 4년 뒤인 선조 20년 2월 남해안에 왜적이 침공해 아군에게 큰 피해를 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전라좌수사 심암을 처형했다.

선조는 대궐에서 왕자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종실 집안의 셋째 아들로서 본래는 하성군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계산에 밝은 영악한 아이였다. 맑고 선했던 임금 명종이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죽은 뒤 후사를 염두에 두고 종실 집안 사내아이들을 자주 대궐로 불러들여 인품을 살펴볼 때 일화가 유명하다. 하루는 명종이 평시에 쓰는 임금의 관인 익선관을 아이들에게 내주고 "머리 크기를 알고 싶으니 써 보라"고 명했다. 아이들이 차례로 관을 써보고 넘겨주어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하성군에게 갔을 때, 그는 관을 임금에게 공손히 받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이것은 신하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감히 쓰지 못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명종이 "지혜로운 아이다"라 생각해 후사로 낙점한 결과 명종 붕어 후 15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의미에서 선조를 살펴보면, 그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영악한 계산'이라고 부를 성격이었다. 그가 조선을 통치했던 마음가짐 과 자세를 고찰하면 금세 드러난다.

진정한 지혜에 바탕을 둔 정당한 리더십이라야 세상을 살릴 수 있다. 계미년 3월에 구원군으로 육진에 출전한 이순신은 바로 그런 리더십으로 육진에 있는 조선군 중에서 최고 최대 전공을 세웠고, 그것이 선조의 마음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계산'으로는 이순신적인 리더십이야말로 자신의 통치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31/20170131026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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