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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시심이 깃든 오세암 대청봉까지(수행 김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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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산행정동우회 작성일17-11-16 14:05 조회1,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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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의 시심이 깃든 내설악을 찾아서

 

산은 나에게는 스승 이였고 그리운 님 이였다. 그 중 눈 바위산[雪岳]은 청초(淸楚)한 양장 미인. 자존심 높은 님 이였다. 누구에게나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 고고한 님 이였다.

허나 세상 살아가면서 그리운 사람 자주 만나는 청복을 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리. 문득 만해의 "님 의 침묵“ 서두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문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 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찾아서, 교대 앞에서 이른 아침 5시 반에 탄 버스가 11시에 내설악 용대리에 도착 백담사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지난 71년 설악산 행에 아침 6시 부산 출발 밤늦게 일방통행의 진부령을 넘어 속초에 도착한 것이 밤10시 였는데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한다. 그 때에는 미시령이나 한계령 길이 열리지 않았을 때다.

시간에 쫓겨 밤늦게 통과했던 용대리 백담사 계곡의 풍광 환한 대낮에 보기는 처음이다. 흰 암석과 그 사이로 흐르는 푸른 물이 소가 되어 반영되는 단풍이 하나가 되어 열어주는 물소리 이와 비교되는 절경이 어디 있으랴.

백담사는 만해 정신이 깃든 곳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흔히 여기를 찾으면 만해는 뒷전에 물러나고, 백담사 주위의 내설악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휘잡는 것을 탓할 수 는 없다, 그건 백담 계곡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리라.

백담사에 무리지은 신도 관광객 등산객들이 어느 누구 만해의 시비 앞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핸드폰으로 인증 삿을 하기에 바쁜데 만해 흉상 앞에서 그나마 인증 삿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만해가 사랑하고 노래했던 임의 모습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위대한 정신의 산실인 이곳에서조차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백담사 앞 계곡에 헤아릴 수 없는 돌탑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슨 원이 그렇게 많길래 저렇게 세워야 하며 세운 뒤에 기원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영시암 오르는 2,5km 계곡을 벗 삼아 가는 길 물 소리 반주에 발마추어 오랜만에 경쾌한 산행의 시원함을 맛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산색(山色) 새잎이 나고 무성해서 영화가 다하면 온 몸을 불사르는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서 썩으면 뿌리로 돌아간다.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나무들도 스스로 버릴 줄 알고 내려 놓는 것도 스스로 한다. 내려놓기 위한 화려한 장엄으로 마지막을 장식할 줄 아는 지혜도 가지고 있다.

허나 끝없는 욕심의 화신이 되어 집착하는 인간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한 잎의 단풍잎보다 나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기에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기 이 땅을 걷는 사람들이여 단풍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기 앞서 단풍에게 배워야 할 지혜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영시암 오르는 길옆의 고운 단풍은 내 서투른 글 솜씨로 쓸 생각은 아예 하지말자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룸에 대한 모독이다.

 

눈이 시리도록 고운 소에 이르는 계곡에 발을 담구어 본다. 대청에서 내려오는 겨울을 예고하는 찬 기운을 담았는지 그 순간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촉감은 정신을 맑게 해준다.

영시암에서 갈라져 오세암 오르는 길, 봉정 가는 길 왼쪽으로 빠져 오르노라면 한 두 사람 어깨 나란히 하기에 좁은 산길 오르면서 내 설악 단풍의 진가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이 가파른 고개 길을 만해는 몇 번이나 오르 나리며 임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했을까? 빼앗긴 산하(山河)만이 임이 였을까?

눈앞에 보이는 내설악의 우람찬 바위 봉오리 하나하나 발밑에 떨어진 낙엽 한 잎 한 잎 모두가 임이 였을 것이다.

만해의 수려한 문장에서 물 흐르듯 흘러나온 시심(詩心)은 배움에서 참선(參禪)에서 정진(精進)에서 우러나온 사유(思惟)였을까.

그렇다면 이 땅의 불문(佛門)에서 정진 참선하시는 스님들이 모두가 만해를 닮기보다 능가하는 시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시암 오세암 가는 길의 안내판을 만해의 “님의 길”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같은 길을 걸으면서 아무 생각 없는 나 자신. 새삼 만해와 같은 지고(至高)한 정신세계가 부러움의 대상에서 경애의 대상으로 바꾸어 지고 있었다.

이 산하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잠시도 쉬지 않고 바꾸어 주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의 고맙고 감사함을 새삼 느끼는 작으만한 행복을 가슴에 묻고 만해의 길. 님의 길을 만해와 함께 걷는 즐거움을 누가 알랴!

축 늘어진 머루 다래의 넝쿨에서 앞서 간 사람이나 여기 맷돼지들이 차지했는지 그 탐스런 열매들은 찾을 수가 없다. 주 등산로에서 벗어난 길이라 호젓한 산길 홀로 걷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눈 속에서 오세 동자가 성불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만두자.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진리가 순환하는 속세에서 그 수많은 사찰들이 이 흐름을 타고 있는데. 특히 최근 6.25한국전쟁에서 불타고 파괴되어 폐허화한 사찰이 한 둘이 아닌데

이렇게 눈 바위산 깊은 계곡 사람들의 접근도 쉽지 않은 골짜기 정갈한 가람을 중수할 원력과 신심은 어디에서 우러 났을까?

건설 장비와 석가래에서 대들보에 이르기까지 기와에서 주춧돌까지 헤리콥타가 아니면 엄두를 못낼 심심 산곡에 불사를 완공한 스님들과 우바이 우바세에게 경건한 존경의 마음을 드린다.

천진극락보존[天眞極樂寶殿]에 모신 백의관음 좌상에 경건한 예배를 올리고 여기서 득도하신 만해 한용운의 오도송을 기억해 본다.

男兒到處是故鄕 대장부가 이른 곳이 바로 고향인데

幾人長在客愁中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묻혔던가

一聲喝破三千界 한번 큰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열리니

雪裡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한잎 한잎 날리는 구나

1917.12.3 좌선중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만해가 살았던 절은 불타버리고 득도한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 볼 수 없다. 새롭게 중창한 가람. 당호가 새로운 시무외전[施無猥殿] 두려움 없는 보시를 해준다는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원만한 상호(相好) 신심(信心)이 저절로 우러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던 온갖 짐을 다 내려놓고 여기에서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의 한 구절을 되새겨 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나의 나룻배에는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이용하였으며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생사(生死)일여(一如)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업보에 동참한 중생들은 나와 삼세에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 오세암의 밤하늘에 정좌(靜坐)해 있을 득도(得道)한 선사(禪師)들의 영지[靈智]에 물어 보아도 대답이 없다.

깊어 가는 오세암의 밤하늘 병풍 같은 산악이 무겁게 눌러 않았는데 별빛은 절을 닮았는지 화려하지 않다. 하늘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갖지만 죄 없는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여기 오세암은 커피 인심이 후하다 맥반석 사이 흐르는 약수에 밤새 자판기가 무료로 돌아가는데 별을 헤아리면서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잔 심신(心身)이 녹아들고 밤 하늘아래 차거운 대기를 마시면서 별을 헤아리는 즐거움에 내일을 꿈꾼다.

여긴 찾아오는 등산객이 많은데 식당이 아직 지어지지 않아 마당 한구석에 걸터 앉아 절에서 제공하는 된장 미역국에 밥 말아 먹고 새벽 봉정암으로 길을 나선다.

오솔길에 깔린 고운 낙엽을 밟아본 기억이 언제인지 기억을 되살리면서 푸른 소나무와 암벽 사이 흘러내리는 계곡 물. 둥둥 떠있는 단풍의 잔해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리는 숨 찬 길 오르면 새롭게 나타나는 경관들에 마음을 빼앗겨 무심히 길을 걷는다.

국립공원의 배려로 만들어진 사다리 계단이며 계곡을 건너는 다리 하나 하나가 세심한 주의와 주변 환경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알려주고 있다.

최소한의 인공과 최대한의 자연에 절묘하게 조합된 길, 흐르는 물 그대로가 한 폭의 화려한 서양화이다. 물에 취하고 단풍에 취해서 오르는 것만큼 내려가고 내려가는 것만큼 올라가야 하니 계곡을 내려가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오르는 산마루에서 보이는 산의 경관은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기대에 부풀게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오른 마지막 산마루에서 봉정암을 바라본다.

산마루 바위 꼭대기에서 그 아래 자리 잡은 봉정암. 적멸보궁 오층 석탑 아담한 자태 아래 치성을 드리는 청신녀의 모습이 그림처럼 곱다.

 

40여 년전 처음 왔던 봉정에 비해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다. 부처님은 우주 법계에 안 계신 곳이 없다. 어디든 지극 정성하나로 기도하면 될 것인데 꼭 여기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에 와서 기도해야 영험이 있는 것인지.

영험 있는 자리라는 것은 불교문화의 일부이지 부처님의 말씀은 아닌데 허나 봉정은 옛날의 봉정이 아니다 아니 다시 옛날의 봉정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밤새 기복을 비는 신심 깊은 우바새 우바이들이 봉정 좁은 가람을 가득 메우고 거기다가 대청을 찾아가는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다

기암 괴석아래 비탈진 깊은 골짝과 대비되지 않는 우람찬 가람 단풍이 무색할 정도의 무수한 인파가 심산(深山)의 적정(寂靜)을 깨어버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단풍보다 더 고운 색깔의 선남선녀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모두들 대청을 향한 욕심 사나운 등반에 동참하여 오직 일념으로 길을 걷고 있다. 오르는 무리에 같이 합세하여 발걸음을 독촉한다.

한두 번 오르 나린 길이 아닌데 낮 설기만 하다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이 길만은 변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일까.

5.6년 전 오른 길은 이처럼 험하지도 않았고 순탄한 산책길로 남아 있는데 봉정에서 출발하는 처음부터 힘과 인내를 요구한다.

한 나이 젊었을 때 픽켈 없이 거침없이 다닌 이 길이 이제 나이 들었다고 양손에 든 픽켈에 힘을 모으고 조심조심 걷다보니 배나 가중되는 두려움이 앞선다.

소청 휴게소에 도착하니 옛날의 그 위치가 아니다. 시원한 맥주 한 캔에다 따뜻한 라면은 아예 팔지 않는다. 생태계 보존 차원에서 길의 방향을 바꾸었는지 아니면 주변의 나무가 크고 돌들이 부서졌는지 오르는 길이 이렇게 험 한대 내려오는 것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오르 나리는 길을 옛날과 같아 변함이 없는데 나의 몸의 변화를 나 스스로 느끼지 못한 잘못이란 것을 새삼 느끼게 만든다. 이 험한 돌밭 길을 성큼 성큼 올라간 추억과 지금은 돌 하나하나 힘을 주고 짚을 곳의 안전을 생각하면서 걸어야 하니까 고될 수 밖에 없다.

거의 이를 악물다 시피하고 올라간 대청봉 인증 삿을 한다고 늘어선 줄이 거의 오십에서 육십명은 더 될 것 같다 기다리면 한 시간도 부족할 것 같아 인증 삿을 포기해 버리니 마음이 후련하다.

같이 올라간 외국인 팀을 망망한 동해바다와 울산바위 그리고 천불동 계곡을 쳐다보느라 인증 삿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 한계령과 미시령 진부령을 넘나드는 장엄한 백두대간에서 우람찬 기상과 동해바다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산을 타야 하는데 우리는 산을 오르는 자격 미달의 사람들이 산을 올라 우리의 산을 더럽히지는 않는지.

중청에서 한 눈에 보이는 마등령 공릉능선과 천불동의 억센 바위들 그리고 내설악의 칠형제봉 용아장상의 기암괴석 그리고 멀리 북방한계선 넘어 아스라이 보이는 산의 맥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경관들은 사나이 마음에 어떤 활력과 웅대한 기상을 불어넣어주는 걸가!

내려오는 길은 험하고 험했다. 길이 험한게 아니고 내 능력이 마음이 험한 길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다시 이 길을 거닐 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비는 마음으로 한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봉정에 도착하니 저녁 노을이 유난히 곱다.

 

좁은 산 골짜기 우람차게 지어진 봉정에도 물밀 듯이 찾아오는 인파에 몸살을 한다. 오늘 밤 천여 명이 자고 간다니까. 숙소로 배정된 방에는 몸 돌릴 틈이 없다. 아예 잠을 포기하고 밤을 샐 각오로 밖에 나오니 더운 기운이 빠지고 찬 기운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다.

찬바람이 대청을 감돌아 봉정 계곡으로 휘몰아 드는 새벽 3시 흰바위산에서 흘러나온 오염 없는 맑은 물에 깃들은 커피 진한 향기가 흐리 멍텅한 머리를 깨워준다.

달빛은커녕 별빛조차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어둠 속에서 수렴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가장 어려운 곳인 깔딱 바위를 타고 내려간다.

걸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거의 기어 내려간다는 말이 정확할 것 같다. 밤의 봉정은 전기불로 아름답다.

내설악 감싸 도는 밤바람이 봉정의 바위에 부딪쳐 되돌아가는지 찬 기운이 곧 불어 닥칠 겨울을 연상케 한다.

앞에 가시는 나이 많으신 보살님 두 분이 희미한 전지에 의존해 옆 사람이 보아도 불안한 걸음을 하고 있기에 사고가 두려워 한 말씀 드려 보았다.

조금 계시다가 날이 밝으면 내려 오시라고 허나 버스시간 때문에 지금 내려 가야 한다고. 저 나이에 왜 버스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지 지척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 캄캄한 새벽 발 딛을 곳도 찾기 어려운 이 새벽에 버스 시간이 무엇이길래?

하기야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오늘 부산에 도착하기 위한 버스 시간 맞추기 위해서 내려 가면서.

어둠에 묻혀 한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가을이면 가장 아름다운 내설악 수렴동 계곡을 지나쳐야 하는지 지나온 인생을 이렇게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왜 여유 있게 계획을 못했는지?

어둠이 끝날 무렵 수렴동대피소에서 쉰다. 그 나마 끝자락에서 이른 아침의 수렴동 단풍을 보는 즐거움도 괜찮은 것 같다.

맑고 밝은 아침 백담사 오세영의 시비를 읽어 본다

강물

무작정 앞을 보고 가지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 한다

조급히 서둘지 마라

폭포속의 격류도

소(沼)안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無心)한 강물이 영원(永遠)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充滿)에 이른다

자기 내면에 응시(凝視)가 없고 깊은 사유(思惟)없이 고운 언어를 만들 수 없다 어쩌면 시인들은 모두 득도한 선사가 아닐까?

2017.10월 오세암 지나 대청봉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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